진정한 친구관계가 사회의 평화를

진정한 친구관계가 사회의 평화를

진정한 친구 관계가 사회의 평화를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부정부패(不正腐敗)의 의미를 들추어 보자. 부정부패란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는다”는 의미이다. 이 작금의 우리사회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국정이 한 국가의 수뇌가 한 여자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고, 정부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여자의 희생재물이 되었다. “죄 없는 자는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성경의 예수란 존재가 간음한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 그것은 개개인 스스로가 죄 없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각하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지금의 작태가 그렇다.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이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에 의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를 선출했고, 그 지도자가 한 여자에 의하여 농락당했다. 아니, 배신을 당했다. 아니, 처절하게 난도질당하며 희생재물이 되고 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미쳐 광분하고 있다. 그 희생재물의 폭도가 되고 있고,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기득권의 확보를 위해 미치고 있다. 미쳐도 보통 미치는 것이 아니다. 정신병원이 따로 없다. 이렇게 큰 정신병원이 어디 있는가? 미쳐 날뛰고 정신병원의 문을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온 천지에서 시퍼런 칼날을 가지고 죽일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러한 무법천지도 따로 없을 것이다. 광란의 세계가 우리가 처한 현실이 되었다.

 

 

백성이여 깨어나라

 

마녀잡이의 군중이 되지 말고, 마녀잡이에 희생재물을 만들지 마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국가라는 인격체를 유린하는 것이니, 어떠한 대의명분으로 그것은 용서 받을 수가 없다. 그러한 자는 모두 하늘도 용서 못할 천인 공로할“악”이며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전범과 같다. 그 전쟁을 일으키는 전범은 역사가 용서하지 않는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생명을 수단화 하여 유린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제일 큰 악이다. 백성들은 숙고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나라”를 유린 하는 것이 전쟁과 무엇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깨어나야 한다. 잠을 자도 너무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백성들이 몽유병이 걸려 있는 듯하다. 잠자고 있을 때 하는 행위는 깨어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모른다고 “모르쇠”로 일관된다. 우리는 모두 공모자 이다. 아니 공모자가 될 것인가, 진정한 한 나라의 백성이 될 것 인가?를 이제라도 본질의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법구경에는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녹은 쇠에서 나와서 그로 인해 그 쇠가 부수어 진다. 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마음씨가 전투적이고 이기적이라면 그 전투성과 이기성에 의하여 결국 그 자신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인간적이며, 인간적인 사람다운 모습이 되기 위하여서는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며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갑자기 ‘툭’하고 하늘에서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통해서 일상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생겨난다. 서로가 질시하고 미워하면서 사는 세상이라면 오히려 속세를 등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삶이라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여정의 나그네가 아닌가.

 

진정한 친구 관계가 사회의 평화를

 

친구란? 사전적 정의로 풀이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서로 예를 갖추어 정을 나누고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이다. 그러나 나이가 비슷하고, 같다고 해서 함부로 언사를 하거나 함부로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란 그러한 관계가 아닐 것이다.

특히, 우리 주위에는 친구, 가족, 부모, 형제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인관계의 우선은 아마 친구 관계 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 할 때 친구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리고 진정한 친구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아마 그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고루하지 않으며 좋은 것 그런 것 일 것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정결한 마음의 집을 자유롭게 넘나 들 수 있는 사이이며, 소리하지 않아도 향기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말이 침묵 속에서 변함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경지에서 과연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까. 아마 그곳에는 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가 없다.

진정한 친구 관계가 대인관계에서 필요한 최대한의 인격이라고 여기는 사회가 된다면 이 사 회는 이해득실로 가득한 시끄러운 세상이 예전의 “아침의 조용한 나라”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풍토가 조성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한 진정한 친구관계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사라진 이 사회는 너무나도 사람들이 전투적이며, 형식적이 되어가고 있다. 조화를 상징하는 밥상 앞에서도 전쟁을 생각하고,(동양의 젓가락 문화는 조화의 상징이요, 서양의 포크 문화는 전쟁의 상징적인 밥상문화의 표현이다) 상대방의 것을 빼어야 한다는 쟁취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진정으로 인격적인 친구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어진 사회에서는 평화롭다. 배려와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보이려는 자만이 가득한 문화는 싹이 트지 않을 것이며,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겸손의 문화가 팽배할 것이다.

 

동물의 왕국

 

미스코리아든지 미스 유니버스 같은 광고성 아름다움이 난무하고 거리의 잡지나 스튜디오 앞에 혼이 나간 사진이 즐비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정치판에서 다수결로 결정짓는 것 같은 우수운 코매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독하고 상품가치처럼 평가하는 사회의 이런 모습은 부정적인 사회의 한 면이다. 겉치레가 공식화 되어 있는 환경 속에서 길들여진 개개인이 배려하는 마음의 인격과 열린 마음의 건강성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보기 힘든 황폐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진실의 정의는 사라지고, 오만의 얼굴을 한 ‘동물의 왕국’이 되어, 동물의 거죽을 덮어쓴 사자와 호랑이 같은, 혹은 여우와 하이애나 같은 짐승들이 득실거리는 야생의 밀림 이 되어 버렸다. 그 동물의 세계에서는 ‘군중의 힘을 업은 큰소리치는 자가 왕노릇 한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는 기정사실이 된다. 어처구니가 없는 세상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이란, 판도라의 상자에는 과연 희망이 잔존할까?

있다면, 난, 친구라는 단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현자들의 친구관계란

 

현자들은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깨달음의 진리는 하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표현을 여러 가지로 달리하고 있다.

이것은 남녀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형제관계 등 모두에 말 할 수가 있다. 남녀관계에서는 소유의 문제, 부모와자식의 관계에서는 천륜의 정, 형제관계에서는 우애를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전제가 되지 않는 관계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한다. 성서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인격을 갖춘 사람, 평정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치 “희소한 사회”가 되었다. 희소하게 개개인 스스로가 만들어 버렸다.

킥복싱을 보고 광분하고, 권투란 스포츠를 놓고 나라와 나라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 부처가, 예수가, 공맹이 무덤에서 살아난다면 "예전에도 그랬듯이, 세상이 아직도 미쳐 돌아가고 있구나”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한 세상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닌가. 미쳐도 살아보고, 돌아보기도 하고, 선하게도 살아보는 것이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한다면 그래도 ‘인간답게’ 가는 것이 이 세상 재미있게 살다가 가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서 한번쯤은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 되는 것인가. 생각해봄직도 하다.

 

생명을 수단으로 다루는 이는 모두 범법자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것이 남아있는 가족, 형제, 후세들에게 슬픔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별의 아픔 때문이 아니다. 우주와 바 꿀 수 없는 하나뿐인 목숨을 여의는 일 때문이다. 목숨이란 그 자체가 고귀하다. 그 고귀한 생명을 수단으로 다루며 이용 할 때 그것은 ‘악’이다.

그 고귀한 생명을 수단으로 다루는 모두는 ‘악인’이다. 동물보다 못한 하급생명체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명분도 생명을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존재’이다. 아니, 항상 마음 속에 전투를 생각하는 그 자신도 전쟁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 없다. 전쟁은 어떤 이유에서이든지 그것은 ‘악’이다. 우리 사회는 전쟁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한 것 같다. 대립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자 이다. 적대시 하는 것도 마찬 가지이다. 한 조직과 조직의 대립적인 갈등이 이와 같다. 지금 정치판, 경제판, 문화 판의 판도가 그렇다.

조금의 양보도 용납하지 않는다. 조직의 목적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없다. 그것이 소위 정치 한다는 경재 한다는,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사람들의 작태 이며 전쟁이나 다름 없다. 꼴불견이 따로 없다.

이러한 꼴사나운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 되었을까?

그것은 침묵하지 않는 사회, 큰소리를 좋아하는 사회, 구시화문 口是禍門.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 엄연한 진리를 간과한 사회의 풍토의 환경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스스로 한번쯤 망태를 들고 여정의 길을 떠나보자.

나그네 길에 올라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껴보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것이 자기정리와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며 사회의 평화와 조화의 계기를 만드는데 나 스스로가 일조하는 계기가 된다면 시간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실천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본다. 

 글/하운 김남열